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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차별, 돌아오는 2세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한인 이민자들이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CNN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한국을 떠나온 이민 1세대와는 반대로 한인 자녀들은 뿌리를 찾아 한국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 역시 정착이 쉽지 않다고 14일 보도했다.   한인과 백인 혼혈아인 케빈 램버트는 11년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2020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램버트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린 시절 ‘넌 중국인이냐’ ‘쿵푸를 아느냐’ 등의 질문을 받으며 성장했다”며 “늘 불안했고 소속감 없이 사는 게 싫어서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겠다는 심정으로 정체성을 위해 한국으로 이주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에서도 언어와 문화 차이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온전하게 속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샌디에이고대학 스티븐 서 교수는 “정체성과 소속감을 찾기 위해 한국행을 결정하는 ‘코리안-아메리칸’에게 미국 사회 내 인종차별, 총기 폭력, 반아시안 혐오 범죄 등은 강력한 동기가 된다”며 “그러나 한국 생활은 나름대로 정착에 있어 어려움을 수반하고 한국에 가더라도 ‘고향’과 같은 느낌이 들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행을 결정하는 코리안-아메리칸이 증가하게 된 것은 1999년부터다. 재외동포도 장기 체류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고, 이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취업난 타파를 위해 영어 교사가 되려고 한국행을 결정한 이들이 많았다.   한국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2020년 한국에 거주하는 한인 시민권자는 약 4만3000명이다. 2005년(1만8000명)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급증했다.〈그래프 참조〉   대니얼 오(32)씨는 8년간 서울에서 살았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나 같은 한국계 미국인은 이중잣대 때문에 생활하는 게 더 힘들었다”며 “어떤 면에서는 외국인으로 대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 한국인처럼 행동하길 요구하는데 그런 점이 적응에 있어 장애물처럼 여겨졌다”고 전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장벽은 코리안-아메리칸에게 일종의 한계로 작용한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아시아 센터 조지연 소장은 “이들은 한국에서 ‘한국인인데 왜 한국어를 못하느냐’ ‘한국인이 아니냐’ 등의 질문을 받고 이상한 시선에 시달리기도 한다”며 “이는 한인 1세대가 미국에 이민을 왔을 때 받았던 일과 비슷한데 미국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결은 다르지만 일상에서 차별이 표출되는 방식은 미국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김문국(72)씨는 1세대 이민자다. LA로 1985년에 이민을 왔다. 식당, 봉제공장 등을 운영하다가 지난 2020년 한국 춘천으로 역이민했다. 김씨는 “내가 한국을 떠났을 때와 지금이 똑같다면 역이민을 선택했겠는가”라며 “한국이 미국만큼 살기 좋아졌고 특히 치안 문제가 완전히 개선됐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것이 안심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역이민자가 한국에서 제대로 정착하는 것은 아니다. 서 교수는 “한국은 최근 수십 년간 빠른 속도로 발전했지만 그만큼 생활비도 치솟았다”며 “게다가 오랜 이민 생활 끝에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고령에 여행 다니기도 어렵고 친구들과 연락도 끊겨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오히려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양쪽을 잇는 ‘미주 한인’으로서의 역할을 찾을 수도 있다는 긍정적 효과다.   조 소장은 “이러한 결과로 한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에서 한인들은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자신만의 공간을 찾게 된다”며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하게 되면 자신의 장단점을 모두 알게 되기 때문에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미국 한국 한국행 선택한국 한국 사회 한국 생활

2023-05-15

[글마당] 남겨진 진다는 것

와이프가 죽으면 남자들은 화장실에 가서 웃는단다. 반대로 와이프를 보내고 우는 남자를 봤다. 얼마 전 장례식장에서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눈물 흘리는 그를 보고 내 눈에도 눈물 고였다.     부인이 떠난 빈집에서 혼자 움직거릴 그를 상상하며 마음 아파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의 집안 풍경이 떠오른다. 넓은 리빙룸에 들어서면 검은 그랜드 피아노가 다이닝룸을 가로지르는 통로에 있다. 부인이 오랜 세월 수집한 고가구들이 전시장에 들어선 것처럼 각각 외롭게 떨어져 있다. 함께 살던 동반자가 떠나고 가구처럼 남겨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어릴 적 데이트할 때, 나는 내 입으로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싫어도 싫다는 말 대신에 거리를 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스스로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면 연락이 끊어지고 관계는 끝난다. 차라리 떠나는 사람의 뒤를 보며 남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아서였다.     가장 친했던 친구들이 취직했을 때 난 구직을 못 했다. 일본어 학원 새벽반에 등록했다. 한달 한달 지날 때마다 등록했던 사람들이 떠났다. 뚜렷이 갈 곳이 없던 나는 남아 있었다. 결국, 다 떠나고 두 등록생만이 남았다. 가르치던 선생님도 횅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수업을 중단했다.     대학원에서 지리산 여행을 갔다. 남원에서 시작해서 구례에서 끝나는 일곱 고개를 넘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당연히 몸이 연약한 나 때문에 강행군에 방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아버지가 준비해준 건포도와 치즈를 주머니에 넣고 먹으면서 동료들의 뒤를 살살 따라갔다. 중도에 동료들이 하나둘 뒤처지기 시작하다가 하산했다. 일곱 고개에 다다랐을 때 나는 앞장서 있었다.     함께 친하게 어울리던 친구 4명이 서둘러 결혼하고 나 혼자 남겨졌다. 난 선택받지 못하고 계속 남겨지는 한국 생활에 염증을 느껴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시절 동료들마저 학위를 받아 들고 고국으로 직장을 잡아, 떠났다. 내가 기억하는 고국은 춥고 외롭게 홀로 남겨진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국에 돌아가 살고 싶지 않다.     지금도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떨다가 한 사람씩 자리를 떠도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남겨지는 것에 익숙해지며 즐기다가 그렇게 습관화돼버린 것이다. 장례식에서 만난 지인도 부인이 떠난 자리에서 슬퍼하지 말고 추슬러 남겨진 삶을 즐기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한국 생활 그랜드 피아노 학원 새벽반

2022-08-26

[이 아침에] 무용지용의 나로 돌아오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손톱만큼의 유산을 나누게 되었다. 4자녀 상속인 중 맏이인 나는 미국 시민권을 받을 때 한국 국적이 상실되었다. 상속을 받으려면 예전의 임씨였던 내가 미국와서 이씨가 된 이유를 진술하고 내가 나임을 공증 받아야했다. 성이 바뀐 내가 어머니의 딸임을 증명해야 하는 세칭 ‘동일인 증명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장례식 마친 후 한 달 뒤에나 미대사관의 공증인터뷰 약속이 잡혀 그걸 끝내고 오느라 팬데믹의 감옥살이를 했다. 면역력이 없는 장기이식 환자여서, 시간이 많아도 동창이며 친지를 만날 처지가 아니었다. 엄마 사시던 집에서 혼자 지내면서 노후에 많이 쓸쓸했을 엄마를 생각했다. 나의 무심과 자식노릇 못한 불효가 새삼 죄스러웠다.   빈집에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우면 건강에 해롭다며, 동생의 배려로 동생집으로 옮겨 오래 신세를 졌다. 한국의 문학잡지에 몇년 째 책소개와 독후감을 연재하는 동생은 출근 전에 추천도서를 골라서 거실의 콘솔 위에 두고 나갔다. 숙제처럼 그 책들을 읽느라 하루하루가 빨리 지났다. 미국에 홀로 떨어져 사느라 잊고 있었던 혈연을 느껴보는 뭉클한 시간이었다. 동생들과 올케와 조카들의 환대를 받은, 임씨로 지낸 두 달 간의 한국 생활이 고맙다.   길었던 한국방문을 마치고 미국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이씨로 복귀했다. 아버지의 성을 떼어내고, 체면이나 맏이의 부담이 없는 막 살아도(?) 되는 나의 천국으로 온 것이다. 같은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이곳이 더 안심이 되는 까닭은 무얼까? 덜 조신해도 양해가 되는 미국이 편하고 자유롭다.   길게 떨어져 있어도 아쉽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는, 내 이씨의 원조격인 남편 말이 서운하지 않다. 물론 나도 그러했으므로. 결혼 생활 40년차가 넘으면 애틋한 사랑보다는 씩씩한 동지애로 사는 것이지 않은가 말이다.   세상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 없음의 쓸모인 무용지용은 모르고 산다. 쓸모 있는 나무들은 그 유용함으로 인해 참상을 겪는다. 과일나무는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잡아당겨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재목감으로 좋은 나무는 남 먼저 도끼나 톱으로 잘리고 만다. 그래서 못생긴 나무는 무용지용을 통해 이루어 낸 생존 전략을 넘어서 자유롭게 소요(逍遙)할 수 있는 나무로 자라게 된다. 이렇게 쓸모없는 것이 오히려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늙은 부부는 가끔은 서로 효자손을 대신하고, 외출할 때는 종종 팔장으로 지팡이를 대신하는 사이로 산다. 무용지용의 나로 돌아왔다. 쓸모 있던 나도 쓸모 없던 나도 모두 나였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무용지용 한국 생활 공증인터뷰 약속 동일인 증명서

2021-12-29

[이 아침에] 무용지용의 나로 돌아오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손톱만큼의 유산을 나누게 되었다. 4자녀 상속인 중 맏이인 나는 미국 시민권을 받을 때 한국 국적이 상실되었다. 상속을 받으려면 예전의 임씨였던 내가 미국와서 이씨가 된 이유를 진술하고 내가 나임을 공증 받아야했다. 성이 바뀐 내가 어머니의 딸임을 증명해야 하는 세칭 ‘동일인 증명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장례식 마친 후 한 달 뒤에나 미대사관의 공증인터뷰 약속이 잡혀 그걸 끝내고 오느라 팬데믹의 감옥살이를 했다. 면역력이 없는 장기이식 환자여서, 시간이 많아도 동창이며 친지를 만날 처지가 아니었다. 엄마 사시던 집에서 혼자 지내면서 노후에 많이 쓸쓸했을 엄마를 생각했다. 나의 무심과 자식노릇 못한 불효가 새삼 죄스러웠다.     빈집에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우면 건강에 해롭다며, 동생의 배려로 동생집으로 옮겨 오래 신세를 졌다. 한국의 문학잡지에 몇년 째 책소개와 독후감을 연재하는 동생은 출근 전에 추천도서를 골라서 거실의 콘솔 위에 두고 나갔다. 숙제처럼 그 책들을 읽느라 하루하루가 빨리 지났다. 미국에 홀로 떨어져 사느라 잊고 있었던 혈연을 느껴보는 뭉클한 시간이었다. 동생들과 올케와 조카들의 환대를 받은, 임씨로 지낸 두 달 간의 한국 생활이  고맙다.   길었던 한국방문을 마치고 미국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이씨로 복귀했다. 아버지의 성을 떼어내고, 체면이나 맏이의 부담이 없는 막 살아도(?) 되는 나의 천국으로 온 것이다. 같은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이곳이 더 안심이 되는 까닭은 무얼까? 덜 조신해도 양해가 되는 미국이 편하고 자유롭다.   길게 떨어져 있어도 아쉽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는, 내 이씨의 원조격인 남편 말이 서운하지 않다. 물론 나도 그러했으므로. 결혼 생활 40년차가 넘으면 애틋한 사랑보다는 씩씩한 동지애로 사는 것이지 않은가 말이다.   세상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 없음의 쓸모인 무용지용은 모르고 산다. 쓸모 있는 나무들은 그 유용함으로 인해 참상을 겪는다. 과일나무는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잡아당겨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재목감으로 좋은 나무는 남 먼저 도끼나 톱으로 잘리고 만다. 그래서 못생긴 나무는 무용지용을 통해 이루어 낸 생존 전략을 넘어서 자유롭게 소요(逍遙)할 수 있는 나무로 자라게 된다. 이렇게 쓸모없는 것이 오히려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늙은 부부는 가끔은 서로 효자손을 대신하고, 외출할 때는 종종 팔장으로 지팡이를 대신하는 사이로 산다. 무용지용의 나로 돌아왔다. 쓸모 있던 나도 쓸모 없던 나도 모두 나였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무용지용 한국 생활 공증인터뷰 약속 동일인 증명서

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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